런던 여행기 (2022.10)

반응형

유로스타를 타자마자 잠이 들어

프랑스 북부라든지 영국 남부에 대한 기억이 전혀없다.

그저 눈을 떠보니 런던 세인트 판크라스 역에 도착했다는 것.

기차를 탈 때 오랜시간 밖을 구경하는 재미를 놓쳐 아쉬웠다.

두 시간 반정도 걸렸다.

 

기차로 국경을 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플랫폼에 발을 내딛는 순간에도 다른 나라에 왔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았는데

내리자마자 물밀듯이 쏟아지는 영어가 영미권 나라에 왔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감성주점?
동상도 감성적

사실 파리에서 3박을 할까 했지만

마침 런던에서 유학 중이던 친구가 있었고 저번 여행에서의 기억이 좋아

영국에 가는걸로 정했다.

 

친구는 역까지 나를 마중나와주었는데

겨우 두 달여만에 보는 것임에도 너무 반가웠다.

 

친구의 기숙사는 성판역에서 걸어서 10분도 채 걸리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기숙사에 들어서서 받은 인상은

중국인이 엄청 많다는 것.

코로나로 인해 많은 중국인들이 본토에 갇혀있었기에

파리에서는 나름 쾌적했었는데

웬걸 여긴 중국인 유학생이 차고 넘쳤다. 

여기저기 들리는 중국어로 순간 런던이 맞나 싶었다.

저들의 부모님께선 어떤 일을 하기에 그 비싼 런던의 학비와 집세를 감당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ㅎ

 

기숙사밥1

오른쪽 상단의 빵에 핫초코를 담아 먹는 디저트는 처음에 정말 어이가 없었다.

이것이 진짜 영국음식인가 했는데

지금와서 가장 그리운 맛이라는게 신기할 따름..

그리고 저 무지막지한 브로콜리 무더기.. 위에 후무스가 없었다면 다 못먹었을거 같다.

 

 

걸핏하면 20파운드를 훌쩍 넘는 외식물가이기에

기숙사를 이용하여 5~6파운드에 끼니를 해결했다.

 

블랙캡

 

뮤지컬을 보러 웨스트엔드 쪽으로 걸어갔다.

아무리 주말이라 해도 사람이 너무 많았다.

그것도 관광객이 아닌 런던 현지 사람들로 차고 넘치는게 확실히 느껴졌다.

여기도 인구밀도가 상당히 높구나..

익선동 좁은 골목에서 느끼던 그 인파가 한동안 쭉 이어졌다.

 

지나가는 길에 본 한국

원래 her majesty theatre에서 오페라의 유령을 보려 했지만

날짜를 착각해서 다른 날 예매를 해버렸다.

그래서 이미 만료된 티켓인지도 모르고 내밀어봤지만 무용지물ㅠㅠ

이런 바보같은 실수를 한 건 처음이어서 당황스러웠다.

회사가 사람을 망치는 거 같어 아무래도

 

그래서 갑자기 시간이 붕 떠버려서 친구와 런던 시내를 걸었다.

3년만에 왔음에도 생각보다 익숙해서

새롭다는 인상을 전혀받지 못했지만 오히려 친근하게 느껴져 좋았다..

주로 친구와 대화를 하며

빅벤, 국회의사당, 템즈강, 버킹엄궁을 지나 기숙사로 돌아왔다.

 

너무 피곤해서 밤 10시 경에 잠에 들었는데

친구는 책상에 앉아 새벽 3시가 넘도록 학업에 매진했다.

내가 어느정도 자서 잠시 잠에서 깼을 때 그제서야 친구가 침대에 누웠다.

 

적지 않은 나이에

낮선 타지에서

그것도 안락한 환경이 아닌

협소한 방과 비좁은 샤워실에서

무궁무진한 미래를 위해 정진하는 친구의 모습에

경외감 내지 숭고함을 느꼈다.

무엇보다 내년 유학을 계획 중인 나에게

가장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예시가 눈 앞에 보이자

과연 난 이런 환경을 2년 넘게 견딜 수 있을지 자문하며

막연한 두려움이 생겼다.

 

근로소득이라는

삶을 영위하기 위한 기본적이고 안전한 수단이 없이

확신할 수 없는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까.

 

한동안 월급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이는 삶에 대한 절대적인 보험과도 같아서

그 권리를 잃지 않기위해 상당한 시간과 에너지를 바쳐야 한다.

그러고는 주기적으로 들어오는 돈으로 적당한 니즈를 충족하고 이에 만족해 버린 채

일상이 주는 느긋한 함정에 빠져 발전없이 서서히 시들어간다.

 

 

이러한 얘기를 외국계회사로 이직을 앞둔 외주 부장님에게 했더니

단호한 어투로 월급은 사회에서 한 개인이 여유를 가지게 하는 엄청난 요소이며

사람은 여유가 있을 때 비로소 무엇인가를 시도할 수 있게 된다고 했다.

 

생각해보니 일을 통해 체력을 소진하면서도

돈에서 오는 경제적 자유도가 있었기에

내가 유학을 생각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역설적으로 이를 무작정 비난하고 있었으니 

내 편협한 시각을 반성했다.

 

만약 내가 정말 절박하고 힘든 처지에 있었더라면

자아실현보다는 먹고살기 위해 뭐든 하지 않았을까.

 

대기업이 주는 금전과 복지를 포기하고

2년이라는 시간 뒤에 내게 무엇이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행복하고 건강한 사회에서 미래를 그리고 싶다면

눈앞의 유혹을 과감하고도 단숨에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아직 든든한 백업이 있을 때 다음 스텝을 철저하게 준비해놓자.

 

기숙사 view

아침 기숙사 창 밖에 무심코 비친 햇살은

내 고민에 희망을 약속하는 듯 했다.

삶 속에서 이러한 작은 단편을 발견해가며 고난과 역경을 버텨가는건 아닐지.

 

중고등학교 시절 기숙생활과 대학교 때 학업에 대한 추억이 교차하며

그 시절에 가졌던 감정이 되살아났다.

회사를 다니는 지금으로썬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 같았지만

이 역시 익숙해질 것이다.

 

 

주말이라 기숙사 구내식당에서 11시경에 브런치가 나오므로

그전에 주변을 구경했다.

 

어제 내가 도착한 성판역과 킹스크로스 역 9 3/4 승강장,

그리고 구글UK와 삼성 플래그십 스토어를 지나

근처 작은 생태공원 산책을 했다.

 

다람쥐 등 숲속의 친구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런던이면 엄청난 대도시인데도

도심에 시골에 온 듯한 공원이 잘 보존되고 있다는 것이 좋았다.

 

버크셔 헤서웨이 부동산?

부동산이 있어서 잠시 집값을 봤는데

4백만 파운드 이러길래 도망갔다.

 

아침밥

이후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에 갔다.

보통은 테이트 모던이 유명하기에 나도 저번 여행 때 모던만 갔었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 프랜시스 베이컨이란 영국화가를 알게되었고

스타일이 너무 특이해서 사람을 사로잡는 것이었기에 기회가 있으면 꼭 보고 싶었다.

그의 대표작 중 교황이 전기의자에 앉은것 마냥 괴로워하는 그림이 있는데

권위와 존경의 정점에 있는 사람을 통해 효과적으로 인간의 내면을 드러낸 것 같았다.

 

벨라스케스 / 프랜시스 베이컨

외면과 내면의 극명한 대비처럼 느껴졌는데

교황이라는 자리가 주는 압박감, 인간으로써 가지는 온갖 고뇌를 표현한 엑스레이와 같은 그림?

가식없고 솔직해서 맘에 들었던 작품.

 

 

베이컨의 작품이 전시된 곳은 몇 없었기에

지난 4월 즈음 런던에서 특별전이 열렸다는 소식을 뒤늦게 알았을 때 매우 아쉬웠다.

다행히 테이트 브리튼에 그의 트립티크가 상시 전시 중에 있다는 정보를 알게되어

고민도 없이 가기로 결정했다.

(테이트 모던은 다음에 또 가는걸로)

 

이 곳 역시 여느 런던의 미술관처럼 기부입장을 하는 곳이었기에

기부함은 바로 pass했다.

기이하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반인반수 느낌.

외관상 십자가형과는 전혀 관련이 없어보인다.

 

 

 

윌리엄 터너 초상화

 

 

데이비드 호크니 - 풍덩

주말이었는데도 꽤 한산해서 좋았다.

가족 단위의 관람객들이 꽤 보였는데

어릴 때 부터 이런 그림들을 보며 자란 아이들은 훗날 어떻게 커갈지 궁금하다.

 

Battersea powerplant

 

테이트 브리튼은 런던 서쪽에 있기에

좀 더 걸어서 배터시 발전소를 보러갔다.

19년에 갔을 땐 한창 리모델링 중이었는데

지금 가보니 마무리 공사 중이었다.

공교롭게도 핑크플로이드 Animals 리마스터 앨범이 최근에 나왔는데 

일부러 완공시기를 맞춰 발매한듯 하다.

 

 

이쪽 동네는 한적해서 걷기 정말 좋았다.

 

 

가을 냄새 물씬

이후 빅토리아역을 지나

포트넘앤메이슨 가게를 가기위해 버킹엄궁전과 그 옆에 있는 공원을 지났다.

공원이름이 Green Park였는데 예전에는 영국 왕실 전용이었지만

지금은 시민들에게 개방되었다고 한다.

넓은 잔디밭과 적절한 간격으로 배치된 아름드리 나무들만이 대영제국의 위엄을 갖춘 채

옛 영국 왕실의 소유였음을 주장하고 있었다.

 

 

포트넘앤메이슨에서 차를 좀 샀다.

여기서 그간 보기힘든 한국인들을 다 봤던 것 같다.

이후 바비칸 센터 구경을 하러 런던 시내를 가로질렀다.

 

뭔가 찰스 디킨스 소설에 나올 것만 같은 

옛 건물을 우연히 발견

 

 

 

일요일이었는데

성공회 교회 안뜰에 휴식공간이 있어 잠시 앉아서 쉬었다.

 

 

드디어 바비칸센터 도착.

여기는 주상복합이라

거주지, 예술학교, 공연장등 복합시설이 들어서 있었다.

3년 전에 왔을 땐 겉만 보고 지나갔는데 이번엔 디테일하게 돌아다녔다.

 

불쾌한 골짜기

1주일정도 여기 살면 미칠지도..?

 

바비칸 센터 공연장 내부는 겉과 달리 세련됬다.

사진을 안남긴게 아쉽..

 

3년 전에 사진 찍었던 곳.
barbie girl

 

저녁

 

Garden Hall에서의 마지막밤.

친구는 그 날도 밤 늦게 과제와 작업을 병행했다.

정상을 향해 근접한 친구에게 부끄럽지 않게

나도 계속해서 발전해 나가야지.

 

 

다음 날 해 뜰 무렵

부슬부슬한 비를 맞으며 친구가 역까지 전송해줬다.

가까운 시일 내에 또 보자!

 

히드로행

 

짐을 붙이는데 직원이

왜 한국인인데 사우디를 거쳐가냐며 의아해하면서 웃길래

당연히 가격이 훨씬 싸서 고민할 여지가 없었다라고 해명을 했다.

드디어 먹는 잉글리시 브렉페스트

아침을 먹고

공항에서의 여유를 즐겼다.

 

프레드 아스테어 & 진저 로저스

 

 

야자수 모양의 기둥, 지붕
사우디 와퍼
유로스타 측에서 지연된것에 대해 5만원 정도 환불해줬다.
이거 진짜 팔리는지 의문
무섭네 갑자기

 

 

내가 영국에 갔을 때는 

반 세기 넘게 왕좌를 지킨 여왕이 세상을 떠난지 얼마안되었고

신임 총리 리즈 트러스의 파격적인 정책으로 인해 영국이 대내외적으로 시끌벅적했을 때였다.

그녀는 내가 한국에 오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사퇴했고(결국 quitter가 되어버렸다.)

얼마후 인도계 리시 수낙이 PM으로 선출되었다.

3년 전에 영국에 갔을 때도 총리 관저앞에 브렉시트 관련 시위가 있었던게 떠오를 정도로 영국은 요즘 격변의 중심에 있다.

난 그 짧은 시간 동안 엄청난 정책 변화와 인종과 성별을 넘나드는 총리의 교체가 일어난 영국을 보며

경제적 성과를 차치하고서라도

다양성이 존중받고 맡은 일에 책임지는 사회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업적에 대한 평가는 냉정하게 받아들이고

오래동안 이어진 사회 시스템을 준수하는 그들의 성숙한 단면을 보며

내가 속한 국가, 회사 등의 모습을 떠올렸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