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날 때 내가 어딨는지 까먹을 때가 종종있다. 이는 잠에서 깨고나면 한동안 정신을 못차리기 때문일 것이다.
집인 줄 알았는데 군대 생활관이었을 때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
또한 집이 아닌 아무도 없는 동아리방에서 혼자 일어날 때면 매우 허무하면서도 외로워 빨리 집으로 가는 아침 지하철을 탄다.
이런 현상은 대게 주변 상황이 급격하게 변할 때 일어나는데, 여행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대신, 집인 줄 알았는데 잠에서 깬 직후 비몽사몽하며 맡게 되는 이국적인 냄새.
새로운 광경을 보게되면 그 순간 내가 타지에 있음을 실감하게 되고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에 대한 그 동안의 여정이 떠오름과 동시에 이것이 꿈이 아니라 사실임을 깨닫는다.
그제서야 내가 일상에서 벗어나 한동안 여행만을 목적으로 살 수 있다는 희망과 함께 기분좋은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
건축에 관심이 많은 나는 여행을 갈 때 마다 유명한 건축물이나 저명한 건축가가 남긴 작품을 보러 다니곤 한다.
런던에도 이미 수많은 건물들이 즐비해있지만 내 관심을 끈 것은 단연 브루탈리즘으로 유명한 바비칸 센터였다.
이 곳은 거주, 오피스, 문화공간 등이 한데 어우러진 복합단지이며 건물들의 양식과 구성이 주변과 매우 이질적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에펠탑이 그랬듯 한동안 런던의 흉물로 자리잡았다고. 그러나 시간이 지날 수록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무려 앤드류 로이드 위버의 '오페라의 유령' 초연이 열린 곳이 이곳이라고..
한 바퀴 쭉 둘러보니 무슨 디스토피아 소설에 나올 것만 같은 비주얼이었는데
지금보기에도 파격적인, 매우 실험적인 건축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변과의 조화를 깡그리 거부해버리는 디자인.
런던은 무슨 의도로 이 건물을 지은 것인지 참 궁금할 정도다.
그래서 건물을 돌아다니며 마치 현대미술 전시관에 와있다는 착각을 했던 것 같다.
이후 근처에 위치한 시티오브런던을 향해 걸어갔다.
예전에 런던 관련한 다큐를 보며 이쪽 구역이 나온 것을 봤는데,
무슨 회사원들 점심 먹는 풍경이 영드 그 자체였다. 오피스 룩이 무슨 배우여..
그래서 별다른 관광명소는 아니어도 항상 이 곳에 가고 싶었다.
수많은 금융회사며 회사원들이며 그 활력을 보고 싶었다.
우선 영란은행 본점에 가서 구권 지폐를 신권으로 바꿨다.
나에겐 옛날 1파운드 동전도 있었는데 얘는 더이상 안바꿔준다고.. 그냥 기념품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볼일을 다보고 나오니 눈 앞에 회사원들 천지였다.
마치 시부야 횡단보도 마냥 사방에 양복입은 사람들이 가득찼고 혼자 여행객 차림인 나는 주눅이 들고 말았다.
서로 말없이 자기 일을 위해 걸어가는 그들을 보며 동서양 막론하고 다 비슷하다는 인상을 느꼈다.
한국에서의 서양 외국인에 대한 이미지는 프리하고 말 많고 이런 거였는데 정작 여기선 매우 차가워 보였다.
그래서 동양에 오는 외국인들만 오픈 마인드를 가진게 아닐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기에 그런 그들을 보고 우린 모든 외국인들이 프리할 것이라는 착각을 하는 건 아닐까?
그렇게 새로운 컬쳐쇼크를 받고 수많은 콧대 높은 금융회사들에 주눅 들었을 때,
시티오브런던의 중앙에서 홀로 오성홍기를 펄럭이는 뱅크오브차이나 건물을 보며 위안을 얻었더랬다. (중국몽 아님)
런던에는 스벅만큼이나 코스타커피 NERO커피 등 다양한 커피브랜드 전문점이 있다.
그중 이탈리안 정통커피를 자처하는 카페네로에 가서 라떼랑 쿠키를 먹었다. 커알못이라 맛은 잘 모르겠다.
단거를 먹으니 심란한 마음이 어느정도 가라앉아 다시 움직였다.
2018년에 주식을 살까말까 참 고민 많이 했었던 DBK... 안 사길 잘했다. 대형은행임에도 리먼 사태 이후 주가가 10분의 1 토막 난 상태.
시티오브런던은 정말 옛것과 새것의 조화가 잘 되어 보인다. 길거리고 관리가 참 잘되어 있고..
이곳에서 일하는 엘리트들을 보며 정말 부러웠다.
이제 테이트모던 미술관으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세인트폴 대성당을 지나..
밀레니엄 브릿지를 지나..
테이트모던에 도착했다.
런던은 미술관이 전부 무료(정확히 말하면 기부입장)라 돈없는 학생에겐 정말 좋다.
하지만 이미 오전부터 자전거에 엄청나게 걸어다녔고, 아침으로 먹은게 커피랑 쿠키가 전부라 기진맥진한 상태..
미술관 앞 광장에서 하는 버스킹을 들으며 좀 쉬고 들어갔다.
이 현대 미술관은 옛날에 무슨 공장이었다가 리모델링 후 시민들의 곁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평소 현대미술의 난해함을 즐기는 나로썬 매우 좋았다.
특히 그 이해할 수 없음에서 오는 무력감과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다리 아픈건 빼고..
테이트모던 미술관은 주변 건물들보다 높기 때문에 옥상에 올라가면 런던의 훌륭한 뷰를 볼 수 있다.
한 눈에 봐도 비싸보이는 레지던스.. 아마 집안이 관광객들에게 다 노출되기에 깨끗이 정리해놓은 듯 함.
굴뚝과 저 멀리 보이는 시티 오브 런던
세인트 폴과 그 뒤로 보이는 바비칸 센터의 어두운 모습
왜 다른 뷰는 안찍었는지 의문이다.
1층에 내려가서 아까 내부가 훤히 보이던 레지던스 구경을 좀 했다.
찾아보니 여의도 파크원을 설계한 리처드 로저스의 작품. 저 빨간색 골조가 이 아저씨 시그니처인가 보다.
그나저나 이런데 살려면 얼마가 필요하지?
이제 뭐 좀 먹으려고 드디어 보로마켓으로 향했다. 다시 공용자전거를 타고 살짝 내리는 비를 가로지르며 위험한 찻길을 달렸다..
그렇게 친구가 추천해준대로 보로마켓에 가서 이것저것 주워 먹었다. 맛은 나쁘지 않았지만 물가때문인지 저렴하진 않았고
무엇보다 여기가 관광지여서 그런지 단체 여행객들을 보며 홀로 고립된 느낌을 강하게 느꼈다.
스카치에그는 아마 배고파서 맛있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냥 영국의 전형적인 음식이라는게 느껴짐
한편 굴은 한국보다 비쌌지만 비릿한 맛이 거의 없었고 같이 곁들어 먹는 소스와 어우러져 정말 맛있었다.
보로마켓 한바퀴 돌며 식재료를 구경한 뒤 템즈 강변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아까부터 비가 조금 내리고 말고 하더니 급기야 폭우가 쏟아졌다.
다행히 우산은 있었지만 정말 천장이 무너진 것 마냥 비가 정말 매섭게 내렸고, 이 정도는 거의 2011년 우면산 산사태 났었을 때와 비교할 만 했다. 다행인 것은 국지성 호우라 금새 지나갔고 다시 해를 볼 수 있었다... 이게 바로 런던의 날씨?
2018년 당시에 한 회계법인에서 인턴을 했었다.
뭐 pricewaterhouse coopers(pwc)와 제휴를 맺었다고 하는데
그것보단 회사가 새로 완공된 아모레퍼시픽 신사옥에 입주해서 매우 좋은 환경에서 근무했다는 점.
또 집이랑 가까워서 매일매일 따릉이로 출퇴근 했었다. 인턴이라 박봉이었지만 이래저래 좋은 경험.
비가 완전히 그치고 강변으로 가니 조성을 정말 잘해놨다.
서울의 반포나 여의도보다 어떻게 보면 더 깔끔하게.
정말 내가 유럽에서 봐오던 모습이 아닌 잘 관리된 이미지. 주변엔 런던 시청사도 근처에 있고 타워브릿지도 있고..
근데 왜 사진을 안찍었는지 의문이다.
그렇게 걸어서 타워브릿지를 건너고 이번엔 어촌부두를 개발해 조성한 카나리 워프 금융지구를 가기로 했다.
여긴 런던 외곽에 위치해 있는데 약간 파리의 라데팡스와 비슷.
자전거를 타고 한참을 가야했지만 런던보다 몇 배 큰 서울을 따릉이로 누빈 나에게는 멀지 않은 거리였고
삼심분 정도 걸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비록 차도를 공유했지만 자전거 길도 잘 마련되어 있어 편하게 갈 수 있었다.
확실히 외곽이라 그런지 가는 도중에 가정집을 자주 볼 수 있었는데 이런 좋은 환경에 살 수 있는 런더너들이 부러웠다.
그리고 도착했을 땐, 교외라 하기엔 어색하게 신식 고층 빌딩들이 들어서 있었다. 주변 자전거 정류장에 정차하고 카나리 워프 역이 있는 중심부로 걸어들어가면..
알고보니 산탄데르 자전거도 스페인의 산탄데르 은행이 후원해서 만들어진 거라고 한다.
시티오브런던에서도 수많은 금융회사가 있지만 여기에서도 어마무시하게 들어서 있었다.
게다가 끊임없이 확장공사를 하고 있었다.
서울은 지금 건물을 지어도 공실률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데 얘네는 그런 걱정이 없나보다.
계속해서 밀려드는 해외 자본을 굴리고 브렉시트를 해도 끄떡없는 영국..
영국은 정말 다른 유럽나라같이 관광업으로 먹고사는 나라가 전혀 아니었다.
퇴근 시간이 되자 집으로 향하는 수많은 엘리트들의 모습을 보며 내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열심히 살아야지.
하루 종일 돌아다녀서 그런지 지하철을 타고 돌아가려 했으나 그냥 천천히 자전거를 타고갔다.
그렇게 텅 비어버린 시티오브런던을 지나 트라팔가르, 피카딜리를 잇는 리젠트 스트리트를 거쳐 호스텔에 도착했고 피곤해서 바로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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